‘Fresh fare’
LA에 있는 마트인 ‘랄프스’가 내 건 슬로건입니다. 2단어의 짧은 문장이지만 2가지의 반전이 있어요. 하나는 Fresh와 어울려야 할 단어는 식재료인 거 같은데 여기에 Price를 내세웠다는 거고, 또다른 하나는 Price 앞에는 Everyday low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Fresh를 수식어로 붙였죠.
이렇게 살짝 비틀었는데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존재감이 산뜻하게 살아나요. 가격이 쌀 거라는 예상을 하고 매장을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지죠. 곳곳에 가격을 할인하는 이유가 붙어 있거든요. 최저가 보장으로 고객들을 안심시키기 보다, 이유가 있어서 싸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거예요.
가격 할인에 근거를 만든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만 이해해보고 싶다면, LA에 있는 ‘랄프스(Ralphs)’ 매장으로 가볼 필요가 있어요. 함께 가보실까요?’
랄프스 미리보기
• #1. 매장 밖에서 할인한다
• #2. 광고 매대라서 할인한다
• #3. 행동하는 고객에게 할인한다
• #4. 못 파느니 할인한다
• #5. 어울리는 조합으로 할인한다
• #6. 자주 오도록 할인한다
제품의 원가 < 제품의 가격 < 제품의 가치
한국의 피터드러커라고 불리는 윤석철 교수가 설명하는 ‘생존 부등식’이에요. 제품의 원가보다 제품의 가격이 높고, 제품의 가격보다 제품의 가치가 크면 기업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지요. 여기까지야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인데, 윤석철 교수는 여기에다가 이 설명을 덧붙이면서 차원이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요.
제품의 가치 - 제품의 가격 = 제품의 가격 - 제품의 원가
제품의 가치에서 제품의 가격을 뺀 고객 효용의 크기. 그리고 제품의 가격에서 제품의 원가를 뺀 기업 이익의 크기. 이 둘이 등가에 가까울 수록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고객 효용이 과도하게 크면 기업의 이익이 줄어드니 경영이 악화되고, 기업 이익이 지나치게 크면 고객의 효용이 줄어들어 수요가 감소하면서 기업에 타격이 생기니까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죠.
생존 부등식에서 볼 수 있듯이, 가격은 기업의 흥망성쇠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기업이 생산하는 원가보다 낮아서도, 고객이 느끼는 가치보다 높아서도 곤란해요. 그 사이에서 균형점을 잡는 가격 책정이 필요하죠. 생존 부등식이 가격이 존재하는 이유와 존재하는 위치에 대한 명쾌한 설명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균형을 잡는 가격을 책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거시적 경제 상황부터, 기업 내부의 복잡한 요소, 고객의 니즈와 수요 변화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 때 쓸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가격 할인이에요. 원가와 가치 사이에, 가격이 있어야 할 자리를 할인을 통해서 옮겨보는 거죠. 가격 할인은 고객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격을 바꾸는 거지만, 아무리 고객 좋자고 하는 것이어도 무턱대고 자주 혹은 많이 가격 할인을 하면 문제가 생겨요. 할인가가 상시가가 되면 고객들에게 그동안 속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죠. 장기적으로는 브랜드에 손상도 가고요. 그래서 가격 할인에도 근거가 필요합니다.
가격 할인에 근거를 만든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만 이해해보고 싶다면, LA에 있는 ‘랄프스(Ralphs)’ 매장으로 가볼 필요가 있어요. 근거 있는 가격 할인의 정석을 보여주거든요. 랄프스 매장은 그 입구에서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어내요.
‘Fresh fare’
랄프스가 내 건 슬로건입니다. 신선한 식재료가 아니라 신선한 가격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가격 경쟁력으로 존재감을 찾겠다는 뜻이죠. 가격이 쌀 거라는 예상을 하고 매장을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져요. 곳곳에 가격을 할인하는 이유가 붙어 있죠. 최저가 보장으로 고객들을 안심시키기 보다, 이유가 있어서 싸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마트를 둘러보며 랄프스의 근거 있는 저렴함을 알아볼게요.
#1. 매장 밖에서 할인한다
랄프스 매장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팝업 사이니지가 있어요. 주유할 때 갤런 당 최대 1달러까지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에요. 물론 마트 내에 주유소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대표적인 정유사인 ‘쉘(Shell)’과 제휴해 마트에서 적립한 포인트로 셀 주유소에서 할인받을 수 있게 만든 프로모션이에요.
방식은 간단해요. 기본적으로 마트에서 제품을 구매하면 1달러 당 1연료 포인트를 적립해 줍니다. 포인트가 누적되어 100연료 포인트 이상이 모이면, 그때부터 100연료 포인트 씩을 차감하여 갤런 당 10센트 씩을 할인받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100연료 포인트를 사용할 경우 갤런 당 10센트를, 200연료 포인트를 쓰면 갤런 당 20센트를, 1,000연료 포인트를 차감할 때는 갤런 당 1달러를 아낄 수 있는 식이에요. 갤런 당 최대 1달러까지 할인해 준다고 했으니 1,000연료 포인트가 주유 할인폭의 최대치죠.
할인폭이 적립 포인트에 비례해서 커지니 명목상 적립률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주유하는 양이 늘어나면 실질적 적립률이 커져요.
또 한 번 예를 들어볼게요. 주유할 때 10갤런을 채운다고 가정하고 할인을 위해 100연료 포인트를 쓸 경우에는 주유비를 1달러만큼 아낄 수 있어요. 100연료 포인트가 있다는 건 마트에서 100달러어치를 구매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해 1달러의 주유비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1%를 적립한 셈이죠.
이때 10갤런이 아니라 20갤런을 주유하면 2달러를 절감할 수 있어 적립률이 2%로 높아져요. 한 번의 주유에 최대 35갤런까지 할인받을 수 있으니 혜택을 꽉 채워 이용하면 3.5달러까지 절약할 수 있고, 이는 구매 금액의 3.5%에 해당하는 적립률이 되죠.
이처럼 고객의 혜택이 커지면 쉘은 손해를 보는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주유소 입장에서는 갤런당 할인폭이 일정해 할인율이 동일하기 때문이죠. 고객이 한 번에 주유를 많이 하면 할인 금액은 커지지만, 그만큼 비례해서 매출이 늘어나니 주유소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예요. 랄프스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닌 건 마찬가지예요. 쉘과 마케팅 제휴를 한 거라 포인트 차감에 따른 할인 금액을 액면 그대로 보전해 주진 않을 테니까요.
고객은 적립률이 높아지고, 쉘은 고객 방문을 유도할 수 있으며, 랄프스는 적립 혜택을 통해 매출을 늘릴 수 있으니, 모두가 만족스러운 할인 방식이에요. 포인트 사용을 마트 내로 한정하지 않고, 제휴 업체로 확장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2. 광고 매대라서 할인한다
특정 브랜드 제품을 별도의 매대에서 판매하거나 눈에 띄게 진열하면 주목도가 높아져 판매량이 늘어나요. 그래서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공급 업체에 목 좋은 매대를 내주면서 광고비를 받는 비즈니스 모델을 활용할 수 있어요. 국내 서점 등에서 광고 매대임을 밝히고 책을 별도의 매대에 진열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사례죠.
랄프스에서도 광고 매대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푯말을 볼 수가 있어요. 물론 소비자들에게 광고 매대라는 것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어 표시를 해 둔 이유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광고 매대이기 때문에 더 싸게 판다는 거예요. 광고비를 받았으니, 그만큼 제품 가격을 할인해서 고객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이죠.
랄프스 입장에서는 공급 업체에서 받는 광고비가 제품 판매 마진 외의 추가 수익일 텐데, 이를 챙기지 않고 가격 할인에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고객 만족을 높인다는 목적이 크겠지만, 가격 할인을 하면 고객뿐 아니라 공급 업체, 그리고 랄프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의 총합이 커질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에요.
광고 매대를 별도로 구성할 경우 주목도가 높아져 판매가 늘어나는데, 여기에 가격 할인까지 더하면 추가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어요. 특히 가격 탄력성이 높은 제품일 경우 효과가 더 크죠. 고객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고, 공급 업체는 광고 효과를 볼 수 있으며, 랄프스는 매출을 높일 수 있으니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할인 방식이에요.
#3. 행동하는 고객에게 할인한다
랄프스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특정 매대 앞에 쿠폰 발급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센서에 손을 갖다 대면 1달러 할인 쿠폰을 발급받을 수 있죠. 쿠폰에 적혀 있는 ‘유니레버(Unilever)’ 제품이 할인 대상이에요. 유니레버가 할인을 지원하는 프로모션인 거예요.
그렇다면 그냥 팝업 사이니지로 1달러 할인을 표시해두어도 될 텐데 굳이 쿠폰 발급기를 설치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발급기가 매대에서 툭 튀어나와 있어 제품의 주목도를 높이는 효과와 고객의 행동을 유도하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격 차등화를 통해 고객 만족과 판매 수익을 동시에 챙기려는 의도가 담겨 있어요.
팝업 사이니지를 걸어 제품 자체에 대해 1달러를 할인해준다면, 가격 할인과 관계 없이 구매할 의사를 가진 고객까지도 할인해 주게 됩니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할인 금액만큼 수익이 줄어들죠. 반면 쿠폰 발급기를 설치해 쿠폰을 발급받은 고객들만 할인해 줄 경우, 가격에 민감한 고객에게는 할인 혜택을 제공해 구매 전환율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고, 동시에 가격에 덜 민감해 쿠폰 발급기를 그냥 지나치는 고객들에게는 정가를 받을 수 있어 마진을 줄이지 않아도 되죠.
그뿐 아니에요. 현장에서 출력하는 쿠폰 외에 디지털 쿠폰도 활용해요. 랄프스는 매주 금요일마다 ‘Free Frida Download’라는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이때 랄프스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하면 랄프스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제품의 디지털 쿠폰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어요. 2.5달러에 판매되는 에너지바를 공짜로 나눠주는 식이에요. 현물로 할인을 해주는 셈이므로 가격 혜택에 민감한 고객의 매장 방문을 유도할 수도 있고, 고객 만족도도 높일 수 있어요.
이처럼 모든 고객이 아니라 행동하는 고객에게만 할인을 해주는 건 랄프스 입장에서도 이득이에요. 가격 차등화를 통해 고객을 구분함으로써 매출과 이익을 동시에 올릴 수 있으니까요.
#4. 못 파느니 할인한다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들과 달리 농장에서 재배하는 과일이나 채소는 모양이나 크기가 균일하지 않아요. 같은 농장에서 동일한 시기에 생산했다 하더라도 생김새가 다를 수 있죠. 그래서 보통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나 채소가 우선적으로 팔리고 흠집이 났거나, 사이즈가 작거나, 모양이 특이한 과일과 채소는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과일과 채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생김새가 못났을 뿐 신선함, 영양가, 맛 등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랄프스에서는 생김새 때문에 안 팔릴 가능성이 높은 제품을 할인해서 판매해요. 매장 입장에서는 못 파는 것보다 할인해서라도 파는 게 낫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만큼이나 언제 생겼는지도 할인의 이유가 됩니다. 랄프스 매장의 와인 매대에서는 ‘빠른 판매를 위한 할인(Reduced for quick sale)’이라는 푯말을 발견할 수 있어요. 와인은 기본적으로 유통기한이 없고 숙성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데 빨리 판매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와인 레이블에서 빈티지를 찾을 수 없거나 NV(Non-vintage)로 표기된 와인은 오래될수록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와인에는 포도가 생산된 해를 적어두는데 관련한 표기가 없다면 여러 포도를 섞어 만든 와인이라 빨리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할인을 해서라도 빨리 소비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5. 어울리는 조합으로 할인한다
랄프스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의 가격 할인을 합니다. 개당 1.49달러인 우유를 10개 구매할 경우 약 33% 할인해 10달러에 판매하거나, 스타벅스 커피 패키지를 맛을 달리하여 2팩 고르면 17.5% 할인해 주는 식이에요. 묶음으로 할인해서 판매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랄프스에서는 이를 고도화한 방식도 시도하고 있었어요.
750ml짜리 와인을 6병 사고 식료품 코너에서 35달러어치를 구매하면 12달러를 할인해 주는 프로모션이 대표적이에요. 대량 구매에 대한 할인이라는 점에서는 묶음 판매와 비슷하지만, 동일 제품군이 아니라 카테고리가 다른 제품군을 연결해 할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요.
특히 고객의 구매 목적을 고려했기에 더 주목할 만해요. 고객이 와인을 6병 구매한다는 것은 혼자 시간을 두고 마시거나, 여럿이 파티를 하며 마시는 경우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의 경우야 식료품 코너에서 35달러어치의 안주를 구매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는 다르죠. 파티 참여자 수를 고려해 안주를 장만하다 보면 35달러를 훌쩍 넘길 수 있어 가격 할인의 효과를 볼 수 있어요.
#6. 자주 오도록 할인한다
랄프스에서 판매하는 꽤 많은 제품에 이원화된 가격표가 붙어 있어요. 한눈에 크게 들어오는 가격이 할인된 가격이고, 그 옆에 조그마한 크기로 적혀 있는 금액이 정상가입니다. 할인폭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 차이가 있지만, 랄프스의 리워드 카드가 있어야 할인가를 적용받을 수 있어요. 이처럼 조건부의 가격 할인이라면 정상가를 크게 적어두고 할인가를 작게 표시해야 고객에게 혼선을 주지 않을 텐데 반대로 한 이유가 있을까요?
리워드 카드를 조건 없이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가격 할인을 받으려면 리워드 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누구나 연회비 등의 비용 없이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어서 사실상 모든 고객이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요. 눈속임을 하려고 할인된 가격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리워드 카드의 혜택을 실감할 수 있도록 할인가를 크게 붙여 놓은 거죠.
고객을 호도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영수증에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어요. 리워드 카드를 발급하지 않고 정상가로 계산하면,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았을 때 할인받을 수 있는 금액을 영수증에 보여주고 추후에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당 금액만큼의 쿠폰을 지급해요. 직접 할인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구매 금액의 일정 비율을 적립해 주는 것과 비교했을 때 차원이 다른 혜택이죠.
고객 입장에서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랄프스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 아닐까요? 단 건의 거래에서는 마진이 줄어 들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남는 장사입니다. 랄프스 카드를 발급받아 혜택의 달콤함을 맛본 고객들은 향후에도 랄프스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고객 생애 가치(Customer lifetime value)로 보면 랄프스에게도 이득이에요.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지 않은 고객들에게까지 영수증에다가 굳이 쿠폰을 발급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수증에 쿠폰을 남겨 두니 고객들에게 매장을 다시 찾을 이유가 생기죠.
사실 랄프스는 콘텐츠를 쓸 목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에요. 물을 사로 갔을 뿐이죠. 그런데 입구에 내 건 ‘Fresh fare’라는 범상치 않은 접근과 곳곳에 할인의 이유를 적어놓은 푯말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근거 있는 가격 할인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가격 할인의 정석을 발견하고 해석하느라 마트에 한 시간 반이나 있었네요. 예정에 없던 체력 소모로 평소보다 더 많은 물을 산 건 물론이고요.
이 콘텐츠는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 책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하여 제작했습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