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 배를 띄우자, 고객이 몰려왔다

피아크

2022.05.19

‘미래 산업은 파괴적 혁신이 주도한다.’


이 신념에 명운을 건 투자사가 있습니다. 테슬라, 줌을 비롯한 혁신 기업에만 투자하는 아크 인베스트(ARK Invest)입니다. 특히 2020년 한 해 동안 아크 인베스트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며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죠. 2021년 초부터는 수익률에 제동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통적인 산업은 쳐다도보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테슬라의 가치를 알아보고 근거 있는 투자를 한 캐시 우드의 회사답게, 혁신에 투자한다는 기조를 7년째 흔들림없이 유지합니다.


시장을 훌쩍 뛰어넘는 수익률을 기록하며 유명세를 타던 이 회사 대표 캐시 우드(Cathie Wood)에겐 별명이 하나 생겼습니다. 한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돈 나무’로 부르기 시작한 거죠. 캐시 우드의 캐시가 돈을 뜻하는 캐시(Cash)와 한글 표기가 같아서입니다. 투자자에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별명이죠. 대표 이름뿐만 아닙니다. 아크 인베스트라는 이름도 투자회사 이름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왜 하필 방주(Ark)를 회사 이름으로 지었을까요? 방주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노아의 방주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아는 대홍수가 지구를 뒤덮을 거라는 말을 듣고, 방주 안에 모든 생물과 식량을 넣어 대비합니다. 마치 아크 인베스트가 미래의 변화에 필수적인 기업들을 포트폴리오에 담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주가 투자회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투자회사에서만 쓰란 법 있을까요? 부산에도 거대한 방주를 표방하는 문화 복합 생산 플랫폼 피아크(이하 피아크)가 있습니다. Platform of ARK for Creators를 줄여서 피아크(P.ARK)라 지은 이름에서부터 창작자를 위한 방주가 되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름뿐 아니라 역할도 방주와 닮았습니다. 피아크는 라이프스타일 관련 회사에서 만들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산의 선박 수리 기업 ‘제일 SR 그룹’이 오픈한 곳인데요. 침체된 조선업, 부산에서 주목받지 못한 영도 지역에 뿌리를 둔 제일 SR 그룹은 혁신의 방주로서 피아크를 출항시킵니다.


©피아크



#1. 마르지 않는 바다에서 찾은 마르지 않는 수요

선박 수리 기업인 제일 SR 그룹이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진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혁신은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다’라는 위기감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수익을 내는 기업이라면 기존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와닿지 않을 테니까요. 국내 조선업 종사자의 절반가량이 2015년부터 3년간 직장을 잃었습니다. 업계가 휘청이는 동안 제일 SR 그룹이 마음 놓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변화가 절실했죠.


그래서 2018년, 제일 SR 그룹은 지금의 피아크 옆 부지에 사옥을 지으면서 카페 ‘비토닉’을 오픈했습니다. 오륙도와 부산항이 보이는 영도의 바다 조망에 반해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돌이켜보면 비토닉은 관점의 전환이었습니다. 배를 파는 게 아니라, 늘상 보던 바다 조망을 팔기 시작한 거니까요.





영도의 바다 전망은 배가 드나드는 부산항, 개발중인 도심, 오륙도 정경이 어우러져 다른 바다에서는 찾기 힘든 매력을 가졌습니다. 


조선업에는 흥망성쇠가 있을 수 있어도, 사람들이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에 뿌리내린 비토닉은 배에 올라타야 즐길 법한 뷰를 제공합니다. 한 층에 두 개의 면을 모두 창문으로 만들고, 옥상은 루프탑으로 꾸며 바다가 눈에 가득 담기게 한 것입니다. 비토닉은 영도에 손꼽히는 카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20만 조선업 종사자가 10만 명으로 줄어든 해였습니다.


영도의 바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 제일 SR 그룹은 변화의 규모를 키웁니다. 비어 있는 너른 부지를 매입해, 연면적 3,000평의 카페를 세운 것입니다. 유통업 종사자였다면 생각하기도, 실행에 옮기기도 조심스러운 발상입니다. 하지만 선박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에 익숙하다면, 스케일과 규모의 경제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선업 침체로 부지를 비교적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죠. B2C 유통업에 B2B 조선업의 수익구조와 DNA를 더해 전혀 다른 결과가 탄생한 셈입니다.


영도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2020년까지 스타벅스가 입점하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신기산업’, ‘여울’ 등 유독 로컬 카페가 강세를 보여 영도구에서 자체적으로 ‘영도 카페 테마지도’를 만들 정도인데요. 피아크는 한껏 높아진 눈높이에 맞춰 카페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영도 전체를 새롭게 하는 야망을 품고 시작한 프로젝트죠.



#2. 경험은 형태를 따른다

피아크는 건물 외관부터 방주 모양을 닮았습니다. 앞뒤로 길게 뻗은 골격과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평면 넓이가 좁아지는 형태는 방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외관만 방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피아크 안으로 승선하면, ‘배’라는 형태에 맞게 만든 새로운 경험이 시작됩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피아크의 모습. 앞뒤로 길쭉하게 뻗은 골격과 윗층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선박의 구조가 눈에 띕니다. ©피아크


흔히 카페의 1층은 접객과 주문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가장 필요한 기능을 접근성 높은 구역에 배치하는 합리적 설계입니다. 그런데 피아크의 1층은 빵을 제조하는 브레드 팩토리입니다. 피아크에 들어서면 누구나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제빵기계와 30여 명의 제빵사가 일하는 모습을 보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마치 선박을 움직이는 엔진 등의 동력시설과 내연기관이 하단부에 자리하듯, 피아크의 동력원인 제빵시설을 보여줍니다.


1층의 브레드 팩토리와 베이커리 진열대 ©피아크


2층은 실내 갤러리와 야외 오션 가든으로 구분됩니다. 그중 피아크의 차별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오션 가든은, 650평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바다를 향해 뻗어있습니다. 방주의 넓은 갑판을 연상케 하죠. 특히 앞쪽 끝부분으로 걸어가면 탁 트인 바다가 피아크의 다른 오브제와 중첩되지 않고 눈에 들어옵니다. 바닷바람, 바다냄새까지 느껴질 정도로 바다와 거리가 가까우니 마치 바다 한복판을 항해하는 배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기만 하는 바다와는 다른 감각의 경험을 제공하죠.


©피아크


최상부인 6층의 야외 공간은 먼바다까지 조망하는 함교 역할입니다. 그저 높이 있어서 멀리 보이는 게 아니라 동전식 망원경을 설치해 멀리 떨어진 오륙도나 부산항 등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했습니다. 함교에서 망원경은 중요한 정보 수집 창구입니다. 주변의 어망을 미리 발견해 회피하거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중소형 어선을 발견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승조원의 역할을 바다 뷰에 이식하는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6층에 놓인 동전식 망원경. 승조원이 된 듯 먼 바다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바다 풍경뿐만 아니라 건물의 구조까지 배를 타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피아크만의 강점입니다. 기존 카페의 하드웨어 문법을 답습했다면 멋지지만 맥락 없는 외관이 탄생했을 거예요. 제일 SR 그룹은 본업에서 하드웨어를 가져왔습니다. 그 선택 덕분에, 새로움과 공간 경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죠.



#3. 바다와 육지를 섞는 기술

영도는 섬입니다. 다른 지역과는 다리로만 연결되어 있어, 지하철이 다니는 해운대나 광안리 지역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제일 SR 그룹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은 조건이죠. 건물 연면적을 고려하면 지역 주민 외에도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고 재방문하도록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피아크는 처음부터 영도의 랜드마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혼자서만 우뚝 선다고 해서 랜드마크가 될 수 없기에, 제일 SR 그룹은 장기적인 비전도 함께 바라봤습니다. 영도구는 10여년간 진행될 지역 개발 프로젝트인 ‘문화도시’에 선정되어 다양한 지역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는데, 영도라는 지역이 브랜드화 되는 시점에 피아크를 등장시킨 셈입니다. 


제일 SR 그룹은 지역 기반 기업으로서 영도와 바다 모두를 아우르기에 적격입니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곳에서 일하며, 배가 드나드는 부산항의 모습과 도심 정경에 반했다는 피아크 관계자의 말 속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시간이 쌓여있습니다. 그간 육지에서 배를 만들어 바다에 내보냈다면, 피아크를 통해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만 즐길 수 있는 공간 경험을 고안한 것입니다.


피아크 뒤로는 영도의 주거지와 상업 단지가, 앞으로는 부산항과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피아크는 둘을 연결하는 링커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합니다. ©피아크




측면 파노라마 뷰를 통해 보는 영도의 바다와 도심. 적절한 블렌딩이 새로움을 낳았습니다.


먼저, 바다 전망에 육지 전망을 더해 시각적인 새로움을 구현했습니다. 전면의 바다 전망은 물론, 좌우로도 창을 틔워 육지의 풍경도 새롭게 선사합니다. 고객이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구도심과 바다의 풍경이 다른 비율로 섞이죠.


영화관 좌석을 닮은 계단식 좌석. 높이에 따라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골라 앉는 재미가 있습니다.


실내 곳곳에 온실을 설치해, 어디에 앉아도 바다와 식물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수평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바다와 육지 풍경이 섞입니다. 피아크는 3개층 높이의 중정을 뚫어 의자 높이만 한 계단식 좌석을 배치하고 바다와 오션 가든을 바라보게 했는데요. 이 역시 고객이 직접 높이와 뷰를 골라 앉을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구도심과 바다 모두를 한 프레임 안에 담게 됩니다. 피아크만의 절경이 완성되는 것이죠. 수직, 수평으로도 풍경이 섞이지 않는 경우 실내 곳곳에 작은 정원을 꾸며 풍경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합니다. 어디에 앉아도 바다와 식물이 한 눈에 담기도록요.


오션 가든에서 바라본 오션 가든과 영도의 바다. 파란색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초록색 잔디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색적입니다.


바다와 육지의 진정한 블렌딩은 2층의 오션 가든에 있습니다. 바다 앞에 잔디가 이 정도로 넓게 있는 것도 흔치 않은 뷰지만, 잔디밭을 누리는 사람들이 더 흥미로운 풍경을 만듭니다.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아이가 반려동물과 마음놓고 뛰어 노는 등 공원에 놀러온 듯 즐기고 있기 때문이죠.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해서요. 


단순히 바다 근처에 녹지를 조성했다고 해서 이런 풍경이 펼쳐질 리 만무합니다. 방문객에게 피크닉 매트를 대여하고, 다이닝 펍을 두어 자연스럽게 행동을 유도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에 더해, 다이닝 펍 옆에는 팝업스토어를 설치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 새로운 식음료 문화를 경험하도록 볼거리도 마련했습니다. 육지의 엔터테인먼트를 바닷가에 가져다 놓은 셈입니다. 


이를 영도 재생 프로젝트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피아크라는 새로운 공간에 주민의 생활 패턴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도록 여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만 있는 특별한 경험이지만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정도의 새로움. 피아크의 비밀 레시피는 바다와 육지의 맛을 절묘하게 배합한 블렌딩 기술에 숨어있습니다.



방주, 혁신을 맞이하는 방식

피아크 방주는 여전히 채워나가는 중입니다. 초기 기획부터 함께한 도시 문화 콘텐츠 기업 ‘어반플레이’와 협업해 공연, 마켓, 펫 존 등 공간에 새로운 문화를 담아낼 계획이죠. 조선업의 DNA가 크리에이티브 산업에 녹아든 결과물은 어떻게 다를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생명체를 한 쌍씩 모았던 노아처럼, 혁신의 씨앗을 하나씩 모으고 있으니까요.


제일 SR 그룹은 혁신에 투자하면서도 조선업이라는 뿌리를 전면에 내세운 덕에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공간을 선보였습니다. 배를 닮은 대규모 건축물, 너른 갑판처럼 보이는 개방형 야외공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전망 등을 크리에이터, 그리고 라이프스타일과의 연결해 B2C로 진출한 B2B 기업의 사례를 새로 써 내려가는 중이죠.


마치 바다를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발붙이고 있는 피아크처럼 제일 SR 그룹이 본업을 놓지 않은 덕분인지 8년간의 긴 불황을 지나온 조선업에도 순풍이 불어옵니다. 국제해사기구의 환경 규제로 인해 향후 10년간 친환경 선박 발주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어서죠. 물론 미래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요.


아크 인베스트와 제일 SR 그룹은 ‘아크’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면서 미래를 대비하고 있지만, 혁신의 파도 앞에서 둘은 서로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아크 인베스트먼트는 미래만 내다본 반면, 제일 SR 그룹은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과거로부터 이어온 현재에도 발을 디디고 있었죠. 다만, 급격한 변화를 바라보는 심정은 같았을 것입니다. 


‘미래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방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피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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