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 보셨나요? ‘꽃처럼 아름답던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는 지난 2000년 개봉 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죠. 2016년엔 BBC가 <화양연화>를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 중 2위로 꼽았고, 2023년엔 타임지가 지난 100년간 최고의 영화 100편 중 한 편으로 <화양연화>를 소개했어요.
팬들이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화양연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어요. 여운을 남기는 특유의 분위기와 영상미죠. <화양연화>를 생각하면, 양조위와 장만옥의 눈빛, 어딘가 물기를 머금은 공기, 미묘한 시선과 구도, 배경 음악, 빗소리 같은 게 절로 떠올라요.
그런데 2023년 겨울, 홍콩 소호 지역에 <화양연화>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하는 신상 바가 문을 열었어요. 영화 속 미감을 절묘하게 구현해 현대 홍콩인들에게 고된 하루 끝 술 한 잔을 기울일 곳이자, 60년대 홍콩을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자, 홍콩의 전통 주류를 재발견하는 칵테일 바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에요.
킨스맨 미리보기
• 칵테일 바에 영화의 미장센을 구현하다
• 아저씨 술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리다
• 정통성을 찾기 위해 족보를 파헤치다
• 화양연화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홍콩은 내로라하는 칵테일 바들의 격전지에요. 어느 정도인지는 2024년 ‘아시아 베스트 바 50(Asia’s 50 best bars)’ 리스트를 보면 짐작할 수 있어요. 여기에 홍콩, 싱가포르, 도쿄, 방콕, 서울 등 18개 아시아 도시의 칵테일 바들이 이름을 올렸는데요. 1위를 차지한 곳이 홍콩의 ‘바 레오네(Bar Leone)’예요. 참고로 바 레오네는 ‘월드 베스트 바 50(The world’s 50 best bars)’에서도 2위를 차지했죠.
그뿐 아니에요. 4위 ‘코아(Coa)’, 9위 ‘아르고(Argo)’, 10위 ‘오브리(The Aubrey)’ 등 무려 9개의 칵테일 바가 홍콩에 있어요. 50개 중 9개니, 아시아의 18개 도시 중 홍콩이 18%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죠. 이를 10위까지로 좁히면 더 압도적인 결과를 자랑해요. 10개 중 4개를 홍콩에서 배출해 40%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홍콩은 어쩌다 칵테일 바의 도시가 된 걸까요?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문화적 이유. 홍콩은 오랜 시간 동안 영국의 영향을 받았어요. 술 문화도 예외가 아니죠. 그래서 영국이 본고장이면서, 칵테일의 기주가 되는 위스키, 진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또한 중국어와 영어가 공용어라 다양한 문화권 출신의 실력 있는 바텐더들이 홍콩으로 모여들었고요. 여기에다가 동서양이 섞여 있는 문화적 배경은 창의적인 칵테일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죠.
다음으로 정책적 이유. 홍콩은 주류세가 사실상 0%예요. 알코올 도수 30도 이하인 술에 대한 세금이 0%거든요. 30도 이상의 고도수 주류에는 100% 세금을 부과했었는데, 그마저도 2024년 10월부터 10%로 대폭 인하했어요. 아시아에서 주류세가 0%에 가까운 곳은 홍콩이 유일해요. 덕분에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고자 하는 글로벌 주류 회사들이 앞다투어 진출했어요. 그만큼 다양한 술을 칵테일에 활용할 수 있죠.
마지막은 경제적 이유.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 허브 중 하나예요. 그래서 소득 수준이 높고, 칵테일 문화에 익숙한 외국인 주재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요. 칵테일을 소비하는 고객층이 두터우니, 다양한 칵테일 바들이 생겨났어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실험적인 시도나 또렷한 자기다움으로 승부하는 곳들도 속속 등장했고요. 그만큼 홍콩의 칵테일 바 씬(Scene)은 다채로워졌죠.
이러한 상황에서 2023년, 가장 ‘홍콩다운’ 모습으로 도전장을 내민 칵테일 바가 등장했어요. 홍콩 센트럴 지역에 위치한 ‘킨스맨(Kinsman)’이에요. 킨스맨은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 <화양연화>를 모티브로 칵테일 바의 컨셉을 기획했는데요. 단순히 영화의 인기에 기대는 칵테일 바가 아니에요. 홍콩 칵테일 바 씬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죠.
칵테일 바에 영화의 미장센을 구현하다
한때 홍콩 영화 전성기가 있었어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홍콩 영화가 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죠. <영웅본색>(1986년작), <천장지구>(1990년작), <중경삼림>(1994년작), <첨밀밀>(1996년작) 등이 홍콩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어요. 작품뿐만이 아니에요.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여명, 곽부성 등 걸출한 스타들도 이때 맹활약했어요. 홍콩 영화의 화양연화였죠.
이 시절이 끝나갈 무렵 화룡점정처럼 등장한 영화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화양연화>(2000년작)예요.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표현한 작품인데요. 스토리나 대사보다 연출력과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죠.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Top 100’에서 2위에 올랐고, 봉준호 감독 등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로 손꼽을 정도로 수작이에요.
<화양연화>의 영향력은 영화계 밖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요. 패션, 사진, 광고 등에서 꾸준히 그리고 지금까지도 <화양연화>의 스타일, 색감, 공간 연출 등을 모티브 삼거든요. 킨스맨도 그중 하나예요. <화양연화>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열렬한 팬인, 창업자 ‘개빈 영(Gavin Yeung)’은 칵테일 바를 기획하면서 <화양연화> 속 요소와 기법을 공간에 구현했어요. <화양연화>의 팬이라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도록요.
우선 칵테일 바에 들어서면 우측 상단의 그림이 눈에 띄어요. 홍콩의 풍경을 컬러풀하면서도 단순화해서 그려놓았는데요. 여기에 <화양연화> 주인공인 ‘주모운(양조위 분)’과 ‘소려진(장만옥 분)’으로 보이는 남녀가 그려져 있어요. 1960년대 홍콩을 무대로 했던 영화의 풍경을 감각적이면서 모던하게 펼쳐놓은 거예요. 이 칵테일 바가 <화양연화>를 오마주 했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눈에 보여요. 나머지는 은유했거든요.
ⓒ시티호퍼스
<화양연화>에는 거울에 비친 주인공을 연출한 장면이 유난히 자주 나와요. 이때 거울은 주인공들의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적 깊이를 투영하기도 하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가서기 어려운 심리적 거리를 표현하기도 하죠. 또한 관람객 입장에서는 거울을 통해 주인공의 숨겨진 순간을 볼 수 있어, 평면적 화면에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어요. 이러한 시선의 엇갈림에 묘한 긴장감과 아련함이 생기죠.
킨스맨도 영화를 오마주 해 공간에다가 시선을 연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어요. 킨스맨 안쪽 벽에는 거울이 있는데요. 벽면에 평평하게 붙어 있지 않고, 바닥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어요. 덕분에 거울이 없었다면 보기 어려운 자리의 사람들과도 시선이 마주치죠. 그리고 좌석 칸막이를 사람 눈높이보다 살짝 낮게 디자인해 다른 좌석 사람들과도 시선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의도했어요.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시선을 숨기다가도 드러내는 것처럼요.
ⓒ킨스맨
여기에다가 <화양연화>에서 볼 법한 컬러감과 장면적 요소들로 칵테일 바의 디테일을 채웠어요. 붉은색 가죽 소파, 체크무늬의 타일 바닥 등이 대표적이죠.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니라 킨스맨의 관점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했기 때문에 영화를 모른다고 해도 낯설지 않아요. 이처럼 <화양연화>의 요즘 버전 속에 들어온 듯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는데, 첫 페이지에 의미심장한 말이 적혀 있어요.
아저씨 술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리다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을 그리워한다.’
<화양연화> 영화 속 내레이션이에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죠. 영화에서는 사랑에 관한 독백이지만, 킨스맨은 술에다 이 말의 의미를 부여했어요. 그렇다면 킨스맨이 술과 관련해서 낭만적으로 여기는 시절은 언제일까요? 칵테일 바 씬을 놓고 보면 지금이 가장 화려한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죠. 이를 이해하려면 창업자인 개빈 영이 품었던 문제의식을 알아야 해요.
"홍콩은 글로벌한 도시예요. 하지만 항상 바깥세상을 더 동경하죠. 부르고뉴 와인과 코냑을 수입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거기엔 일종의 프리미엄이 붙었어요. 그래서 홍콩, 넓게는 광둥성에 기반을 둔 양조장들이 밀려났고 사라져 갔죠. 다행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사람이 음식, 문화, 자연을 통해 홍콩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재발견하기 시작했어요. 킨스맨은 홍콩 술 역사에서 저평가된 부분을 조명하고 싶었어요.”
- ‘개빈 영’ 킨스맨 창업자, <태틀러 아시아> 중
글로벌 도시의 역설이었어요. 그의 설명처럼 전 세계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다 보니, 정작 홍콩 고유의 문화를 잃어가고 있었죠. 실제로 홍콩에서 아시아 베스트 바 1위에 오른 ‘바 레오네’만 해도 이탈리아 로마 테마의 칵테일 바예요. 4위에 이름을 올린 ‘코아’도 멕시코를 테마로 테킬라, 메즈칼 등의 칵테일을 선보이죠. 개빈 영이 경험한 다른 칵테일 바들도 상황은 비슷했어요. 기주, 주조 방식, 테마 등 홍콩보다는 외국에 무게중심이 있었어요.
개빈 영은 홍콩 지역 고유의 술인 광둥주에 주목했어요.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광둥주가 꽃피웠던 시절을 파고들었죠. 알려지지 않았을 뿐, 찾아볼수록 매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홍콩 바에서 시도하지 않은 광둥주 베이스의 칵테일을 선보이기로 했어요. 또한 과거 광둥 지역의 증류소는 대부분이 가족 사업이었는데요. 광둥주 특유의 가족적 전통을 드러내기 위해 혈연, 친척 등을 뜻하는 ‘킨스맨’으로 칵테일 바 이름을 지었고요.
전통을 잇겠다는 포부는 환영할 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광둥주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었죠. 광둥주는 중장년층의 아저씨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어요.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요. 개빈 영은 이러한 편견이 광둥식 주류를 소비하는 공간과 맥락 탓이 크다고 봤어요. 그래서 광둥주의 부활을 스타일리시하게 알리는 포장으로, 감각적인 홍콩 영화 <화양연화>를 활용한 거예요. <화양연화>와 왕가위 감독에 대한 팬심을 담아서요.
물론 이름과 공간 연출만 바꾼다고 광둥주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킨스맨에서는 광둥식 주류를 새롭게 하는 칵테일 메뉴도 선보였어요. 크게 2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킨스맨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하우스 시그니처’예요. 광둥주를 베이스로 창의적인 맛을 구현한 칵테일이죠. 또 다른 하나는 진토닉, 미도리사워 등 이미 익숙한 칵테일에서 기주만 광둥주로 바꾼 ‘광둥 클래식’이에요. 시그니처 메뉴가 다소 낯설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부담 없이 광둥주를 즐길 수 있게 한 거예요.
여기에다가 칵테일을 서빙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줬어요. 칵테일은 여러 재료를 섞어서 만들잖아요. 그러다 보니 베이스가 되는 술의 고유한 맛과 향을 느끼기는 어렵죠. 그래서 킨스맨에서는 칵테일에 들어간 광둥주를 작은 테이스팅 잔에 담아 함께 제공해요. 그리고 메뉴판에다 각 술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죠. 각 술을 귀여운 일러스트로 묘사해 친근함을 더했고요. 고객은 자연스레 광둥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넓힐 수 있어요.
그런데 메뉴판에서 다양한 광둥주 베이스의 칵테일을 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어요. ‘구룡 데어리’, ‘YBS & 토닉’, ‘라스트 살루트’ 등 킨스맨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칵테일인 하우스 시그니처와 광둥 클래식은 메뉴판 앞부분이 아니라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거든요. 그에 앞서 소개하는 메뉴는 따로 있죠. 그렇다면 킨스맨이 고객에게 간판 메뉴보다 더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요?
정통성을 찾기 위해 족보를 파헤치다
'홍콩 사람들의 이야기’
(A Tale of Hongkongers)
킨스맨 메뉴판의 제목이에요. 첫 장을 넘기면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요. 이어 홍콩인에 대한 소개를 하는데요. 홍콩의 시작이 된 광둥인(Cantonese), 하카족(Hakka), 호클로족(Hoklo), 탄카족(Tanka), 치우차우족(Chiuchow) 등 5개 민족을 알려줘요. 갑자기 <화양연화>를 모티브로 한 칵테일 바에서 원주민 이야기를 하는 게 어색해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메뉴판을 살펴보면 킨스맨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죠.
이 5개 민족은 킨스맨 메뉴판의 카테고리 역할을 해요. 민족 이름 아래 각 민족의 문화를 재해석한 메뉴가 2가지씩 있거든요. 각 민족을 묘사한 일러스트와 문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요. 킨스맨은 광둥주 칵테일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홍콩에 사는 사람들의 선대에 대한 존중을 담고 싶었던 거예요. 이러한 뿌리가 있기에 광둥주를 중심으로 한 홍콩의 화양연화가 가능했다는 걸 넌지시 보여주죠.
(좌) ⓒ시티호퍼스 (우) ⓒ킨스맨
그런데 각 민족의 문화를 칵테일화한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그들이 주로 먹던 식재료를 활용했다거나, 고유한 음식에 착안해 칵테일 맛을 개발하는 건 기본이에요. 더 나아가 이민자로서 갖는 ‘애환’을 칵테일로 승화했죠. ‘하카 언덕 노래(Hakka hill song)’가 대표적이에요. 하카족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칵테일 이름에 특이하게도 ‘노래’가 들어가 있는데요. 이유가 무엇이고, 어떤 맛이 나는 걸까요?
하카족은 전쟁과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광둥성에 정착한 민족이에요. 하지만 이민자로서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산악 지대와 같이 열악한 곳에 정착해야 했어요.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이라 먹고살기 위해 고된 일상을 보내야 했죠. 이때 ‘언덕 노래’라는 노동요로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그래서 하카 언덕 노래 칵테일은 이 노동요처럼 팍팍한 일상 속 한 모금의 휴식과 같은 맛이에요. 업무에 치이느라 괴로운 요즘의 홍콩인들에게도 딱이죠.
칵테일뿐만 아니라 안주 메뉴도 마찬가지예요. 제비집, 용안 등 광둥식 요리나 디저트를 모던하게 재해석해 선보이는데요. 이처럼 킨스맨이 안주 메뉴까지 컨셉의 연장선에 두고 신경 써서 개발하는 이유가 있어요. 술은 어른이 되어서야 접하는 반면, 음식은 어린 시절부터 먹는 거라 ‘향수’와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개빈 영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의 기억을 은연중에 소환하는 건 칵테일 바에서의 고객 경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요.
"과거에 대한 향수는 냉정한 현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줘요. 마치 방아쇠와 같죠. 그것을 누르면 사람들이 포근했던 추억과 같은 특정 감정을 느낄 수 있거든요. 칵테일 바에서의 경험을 완성하는 건 이런 디테일들이에요.”
- ‘개빈 영’ 킨스맨 창업자, <보그 홍콩> 중
이처럼 킨스맨은 과거에 진심이에요. <화양연화>를 모티브로 홍콩 주류 업계의 화양연화를 재조명하면서, 홍콩의 역사와 민족까지도 품어내죠. 그것도 끄트머리에 부록처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 내세워서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먼지 쌓인 지나간 세월을 오늘의 홍콩에 되찾아 온 덕분에 킨스맨은 현재의 홍콩 칵테일 바 씬에서 새로운 화양연화를 펼쳐가고 있어요.
화양연화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킨스맨의 중심엔 <화양연화>가 있어요. 그런데 만약 <화양연화>가 없었다면, 킨스맨은 다른 홍콩 영화를 모티브로 삼았을까요? 물론 <영웅본색>, <천장지구>, <중경삼림>, <첨밀밀> 등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는 많고, 각 영화가 저마다의 메시지와 개성을 가지고 있어 대체가 가능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화양연화>가 아니었다면 킨스맨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몰라요. 사연은 이래요.
개빈 영은 킨스맨을 창업하기 전에 한 잡지사에서 다이닝 분야의 시니어 에디터로 일했어요.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타격으로 일을 못하게 됐죠. 칵테일을 좋아하는 그는, 이 시기에 하루의 대부분을 책과 영상으로 칵테일을 공부하고 연습하는 데 썼어요. 팬데믹이 끝나고 홍콩의 바들이 하나둘 다시 오픈할 무렵, 친구의 제안으로 그는 게스트 바텐딩 일을 하게 됐죠. 평일엔 글을 쓰고, 주말엔 칵테일을 만들며 바텐더로서 성장하는 날들이 이어졌어요.
그 무렵, 운명 같은 일이 생겼어요. 한 번은 여러 F&B 브랜드를 운영하는 ‘싱귤러 컨셉츠(Singular Concepts)’의 행사 자리에 취재를 갔는데요. 여기서 싱귤러 컨셉츠의 대표 ‘데이비드 시트David Sit’를 만났어요.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홍콩 F&B 산업에 대한 관심은 물론, <화양연화>와 왕가위 감독의 열렬한 팬이라는 공통분모가 그들의 강력한 연결고리였거든요. 이때 데이비드 시트가 개빈 영이 만든 칵테일을 맛보고는 둘은 뜻을 모으기로 했어요. 그렇게 <화양연화>와 광둥주를 테마로 한 킨스맨을 기획했죠.
"게스트 바텐더 일을 할 때 칵테일의 컨셉과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사람들이 찾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있었어요. 게스트 바텐더 일은 제게 일종의 테스트 자리 같은 거였어요.”
- ‘개빈 영’ 킨스맨 창업자, <태틀러 아시아> 중
ⓒ시티호퍼스
일이 끊겨 좌절스러웠거나, 이중생활로 일이 버거웠을 상황에서도 그는 주저앉지 않았어요. 마음의 소리를 따라 묵묵히 자기만의 실력을 키웠죠. 그런 날들이 쌓여 지금의 화양연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거고요. 어렵고 힘든 시기에, 그가 시니어 에디터로서 활약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어제의 화양연화에 머물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어쩌면 화양연화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거 아닐까요? 오늘을 소중하고 찬란하게 살아내고 있다면 말이죠.

Kinsman’s Gavin Yeung And Investor Samson Lam On Cantonese Spirits And Modern Mix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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