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생이 ‘궁극의 맛’을 위해 연 레스토랑- Ultra violet
오후 6시 30분. 상하이 와이탄에 위치한 한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레스토랑에서 웰컴 샴페인 한 잔을 건네주고 자리를 안내해 줍니다.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기 위한 메뉴판은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손님들도 메뉴판을 찾지 않죠. 마치 이곳에 식사 하러 온 게 아니라는 듯 샴페인을 마실 뿐입니다.
오후 7시. 말끔하게 차려입은 2명의 웨이터가 모인 사람들의 수를 확인한 후 어딘가로 안내합니다. 레스토랑 바깥에 주차된 허름한 봉고차에 10명이 모두 올라탑니다. 창을 어둡게 칠해 창밖의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눈에 안대를 씌웠다면 누가 봐도 영락없는 납치 당하는 모양새입니다. (오..징어게임?) 지금 향하는 곳에 대한 정확한 주소는 관계자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위치를 물으면 “상하이 어딘가(Somewhere in Shanghai)”라고 대답할 뿐이죠.
약 10분 후 차가 멈추고 한 명씩 내리기 시작합니다. 도착한 곳은 폐쇄된 공장 지대의 한 허름한 창고 건물입니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향합니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고, 푸른 레이저 빔만 어렴풋이 내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하 벙커를 연상하게 하는 이곳은 흔한 장식과 창문 하나 없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입니다. 긴 테이블이 방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10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죠.
스산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Welcome home!)” 홀로그램 영상과 함께 첫 번째 음식이 앞에 놓입니다.
©Scott Wright of Limelight Studio
©Scott Wright of Limelight Studio
이런 발상은 창업자 ‘폴 페레(Paul Pairet)’로부터 나왔죠. 그는 음식을 단순히 ‘맛’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1차원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맛 이외의 모든 감각을 ‘심리적 미각(Psycho-taste)’이라 설명하죠. 일찍이 과학도를 꿈꿨던 그는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궁극의 맛’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맛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음식 맛 외에 다른 감각 기관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와 음식에 대한 감정이라고 가설을 내린 그는 과학 실험처럼 이 변수들을 최대한 통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이 심리적 미각을 추구하기 위해 울트라 바이올렛을 오픈한 것입니다.
식사하는 순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아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하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초 단위로 정확한 시간에 맞춰 코스 요리를 서빙합니다. 영상, 음향, 조향(調香) 장치를 통해 맛에 영향을 주는 모든 감각을 동일하게 통제합니다. 음식은 분자 단위로 쪼개 변형하고 재조합하는 분자 요리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리곤 폴이 세계 여행을 하면서 영감을 받았던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실험실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울트라 바이올렛에선 주방을 랩실이라도도 부릅니다.) 스시, 라비올리, 피시앤칩스 등 분명 이름은 익숙한데 폴이 내놓는 그것들은 먹어보지 않고선 좀처럼 예측 불가능한 요리입니다.
©Ultra violet
울트라 바이올렛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아시아에서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원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은 예약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데, 울트라 바이올렛은 사정이 더 심합니다. 하루에 딱 1번, 총 10명의 손님만 받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긴 하나의 테이블에 합석하는 방식입니다. 10명의 손님을 위해 배치되는 서버는 약 25명. 약 2명의 서버가 1명을 담당하며 한 편의 작품과 같은 요리의 서사가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코스는 1인당 약 4,000~6,000위안 (75만 원~110만 원)으로 총 20개 요리와 페어링한 와인이 서빙됩니다. 식사를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중간 인터미션을 포함해 약 4시간 소요되죠. 최소 3개월 전부터 예약 캘린더가 오픈되는데 상하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예약을 하는 터라 순식간에 마감됩니다. 여행 일정에 맞춰 예약하는 것이 아니라, 예약 성공한 날짜에 맞춰 상하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 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간 레스토랑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덕분일까요? 상하이에선 폴 페레의 심리적 미각을 모티브로 현실 속의 또 다른 세계를 표방하며 고객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는, 이른바 몰입형 레스토랑 (Immersive Restaurant)들이 잇달아 등장합니다.
2022년 오늘, 당나라 연회에 초대받다 - 량셔예옌(良设夜宴)
‘저 음식은 대체 무슨 맛일까?’
사극 등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속의 식사 장면을 볼 때 종종 떠오르는 궁금증입니다. 상하이에는 이 호기심을 채워주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판 울트라 바이올렛이라고도 불리는 ‘량셔예연’입니다.
이 레스토랑은 중국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문화 전성기로도 꼽히는 당나라를 배경으로, 중국의 10대 명화 중 하나로 꼽히는 ‘한희재야연도(韩熙载夜宴图)’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이 명화는 중국 남당(南唐 937-975) 시기, 한 궁중 화가가 한희재라는 고위 관직자의 집을 방문해 그린 그날 밤의 연회 서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결과물입니다.
하루 1회, 12명만 예약받고, 1회 코스가 약 4,800위안(약 90만 원)입니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무려 1,000평. 단 12명의 저녁 식사를 위한 장소치고 지나치게 크지 않나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위용을 과시함과 동시에 실제 고위 관직자의 집에 방문하는 몰입감을 주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임을 고려하면 납득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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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공간 디자인이 고증을 거쳐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만들었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서구식 간결한 인테리어와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대신 창문 모양이나 대들보, 내부 곳곳의 소품들을 당나라를 연상케 하는 요소와 강렬한 색을 활용해 당나라를 모티브로 한 공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창업자 ‘주평(周平)’은 현대의 관점에서 전통의 미학을 재해석하는 디자인에 큰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100% 모방하는 것보단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전통문화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죠. 공간 고증에 지나치게 충실할 경우엔 오히려 민속촌이나 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처럼 자칫 거리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당나라 시대에 당 왕조의 한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죠. 입구에 들어서면서 거대한 저택 규모에는 감탄할 수 있겠지만, 당나라의 건축물 양식이나 인테리어 등을 신기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할 테니까요. 만약 건축물 양식이나 인테리어 등에 중심을 둘 경우, 이 주제는 연회가 아니라 당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 이방인이 당나라로 여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어디까지나 ‘연회'에 집중하기 위해 그 외의 요소에는 잠시 힘을 빼기로 한 거죠.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디자인 양식에 전통 건축의 양식을 녹여 자연스러운 공간을 조성하고, 교과서나 사료 등을 통해 접해왔던 당대 물건 등을 적절히 배치해 현장감을 살렸습니다.
식사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한 장소에 머물러 잠시 쉬어갑니다.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으니 시녀 복장을 한 여인이 홍색 천으로 감싸진 서신을 넌지시 전달합니다. 그 안에는 오늘 연회에서 먹을 코스 요리 정보와 함께 한 개의 한자가 쓰인 종이 패가 들어있습니다. 이는 이후 식사 장소에서 그들이 앉을 좌석 번호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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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컨셉을 차치하더라도 량셔예연은 상하이에 있는 수많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사이에서도 수준급 코스 요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셰프 자오위(赵宇)는 영국 최초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한 셰프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Marco Pierre White)의 수제자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다양한 나라에서 수셰프로 일했으며 전 세계 미슐랭 레스토랑 중에서도 1위로 꼽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Noma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죠.
량셔예옌은 첨단 그래픽 기술과 스토리를 결합해 오감을 만족시키는 경험을 준다는 점에서 울트라 바이올렛과 결을 같이 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통과 현재의 경계를 허물고 공연과 체험적인 요소를 추가해 몰입감을 더한 점이죠.
오늘날 당나라의 연회가 펼쳐진다면? 이란 상상을 바탕으로 당 왕조의 전통 요리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분자 요리로 내놓았고, 당대 전통 건축 디자인 요소를 모던 실내 인테리어 양식에 녹였습니다. 또한 고대 예술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표현함과 동시에 코스 구성에도 녹여 유기적인 경험을 제공합니다. 현대의 공간 속에서 전통이란 콘텐츠를 중심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량셔예옌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융합한 식당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입니다.
©大众点评
‘핀치 가의 저녁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당신이라면 이 미스테리 만찬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지난 2년간 중국 MZ세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 혹은 놀이 트렌드는 단연 ‘오프라인 추리 RPG 게임 (쥐뻔샤, 剧本杀)’ 입니다. 한국 추리쇼 예능 ‘크라임 씬’이 중국에서 리메이크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이것을 현실에서 누구나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한 개념이죠.
방탈출처럼 테마에 맞춰 잘 꾸며진 공간에서 역할을 배정받고 주어진 대본으로 연기를 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형태가 원형입니다. 대본의 양이 거의 단편 추리 소설에 준하기 때문에 한 게임을 진행하는데 2~4시간 소요되며, 다들 대본 속 역할에 온전히 몰입해 배우가 된 마냥 연기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MZ세대들에게 영화 감상과 아웃도어 액티비티 다음으로 인기 많은 대표 여가/오락 활동으로도 꼽혔을 정도죠. 이 게임이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상 속의 일탈입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대본이 창조한 세계관 속에서 또 다른 자아로 몰입하며 현실의 나를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확장한 가상 세계라는 점에서 아바타, 메타버스(Metaverse)의 본질과도 맥락이 비슷합니다.
두번째로, 소셜 기능입니다. 오프라인 추리 RPG 게임은 기본적으로 6~8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며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게임을 합니다. 3~5시간 넘게 연기 호흡을 맞추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죠. 우리나라에서 독서 모임, 소셜 살롱 문화 등을 통해 취향 기반 커뮤니티 모임이 발달했다면 중국에선 이 게임을 기반으로 느슨한 관계를 형성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트렌드를 ‘핀치(Finch 芬奇)’가 영리하게 사업으로 연결시켰습니다. 핀치(Finch 芬奇)는 오프라인 추리 RPG와 레스토랑을 융합한 개념입니다. 추리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저택 미스터리 만찬 설정을 빌려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죠. 낡았지만 관리가 잘 된 대저택 인테리어 속에는 드라큘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음울한 분위기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다이닝 룸으로 들어갑니다.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스크린과 다이닝 테이블 위에 프로젝터에서 쏜 홀로그램 영상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大众点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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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집 속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추리 콘텐츠나 방탈출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과몰입(?)하러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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