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아메리칸 걸(American girl)’ 인형 매장 안에는 헤어살롱이 있어요. 아이를 위한 헤어살롱이 있는 거야 그럴 수 있죠. 인형 가게에 온 김에 헤어 스타일링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옆에 인형을 위한 헤어살롱이 있다는 거예요. 이곳에선 아이의 헤어 스타일에 맞게, 혹은 아이가 원하는대로 인형의 헤어 스타일링을 해줘요. 그뿐 아니에요. 심지어 이어 피어싱, 네일 폴리시까지도 할 수 있어요.
인형을 사면 해주는 무료 서비스냐, 그렇지도 않아요. 엄연히 돈내고 해야 하는 서비스죠. 헤어 스타일링은 10~15달러, 이어 피어싱은 16달러, 네일 폴리시는 5달러예요. 실제 아이들에게 하는 서비스 가격의 1/3 수준이죠. 상술의 끝판왕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철학적인 접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궤변처럼 들릴 수 있어도 아메리칸 걸의 스토리를 알고 나면, 왜 철학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메리칸 걸 미리보기
인형이 나를 닮으면, 자아를 투영한다
인형에 스토리가 있으면, 친구가 되고 싶다
인형에 배움을 더하면, 어른도 좋아한다
사회상이 발전하면, 인형도 성장한다
뉴욕 맨해튼의 중심부엔 록펠러 센터를 비롯해 오피스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어요. 이 주변은 매일 출근해야 하는 어른들에게는 지루한 곳일지 모르지만, 가끔씩 놀러오는 어린이들에겐 지상천국이에요. 록펠러 플라자에 있는 야외 스케이트장에는 깔깔거리며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가득하고, 근처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앙증맞은 컵케이크들과 엠엔엠 스토어의 컬러풀한 초콜릿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아요.
무엇보다 아이들을 가장 신나게 하는 건 다른 도시와 스케일이 다른 장난감 가게들이죠.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장난감 백화점 F.A.O 슈왈츠부터 레고, 닌텐도 등의 플래그십 스토어까지. 아이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부모님들은 등골이 휩니다. 물론 부모님들이 더 신나서 비명을 지르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멋진 장난감 가게들 중에서도, 수십년간 미국 여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곳이 있어요. 바로 인형 브랜드 ‘아메리칸 걸’의 매장,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예요.
이 매장은 특징적인 점이 있어요. 보통 장난감 매장을 찾는 아이들은 빈손으로 들어갔다 새 장난감을 들고 나오죠. 하지만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의 풍경은 조금 달라요. 새 인형을 구경하거나 구매하려고 오는 아이들도 많지만, 들어갈 때부터 이미 갖고 있던 아메리칸 돌 인형을 들고 들어가는 어린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죠. 아니, 인형을 파는 가게에 오는데, 굳이 과거에 샀던 인형을 데려오는 이유는 뭘까요?
호기심을 가지고 매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분명 장난감 가게였는데, 한 켠엔 커다란 헤어 살롱이 자리하고 있어요. 인형을 데려온 아이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어라? 인형들이 작은 스툴에 앉아 스타일링을 받고 있네요. 피어싱을 하고 있는 인형, 작은 손발에 네일아트를 하는 인형도 보이는군요. 옆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인형을 꼭 안고 인형과 똑같은 스타일로 헤어스타일링을 하고 있어요.
ⓒ시티호퍼스
이건 또 뭐죠? 헤어 살롱 옆에는 병원이 있어요. 보통의 경우 장난감 병원이라고 하면 장난감의 고장 난 부분을 갈아 끼우거나 더러워진 부분을 세척하는 곳이에요. 하지만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의 병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요. 치료가 필요한 인형을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손목에는 환자임을 알려주는 팔찌도 둘러 줍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건강 인증서’와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정성스러운 카드도 받죠. 진짜 헤어살롱, 병원만큼 비싸지는 않아도, 인형을 위한 이 모든 서비스는 결코 저렴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기꺼이 인형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아무리 어린이들에게 장난감이 소중하다고 하지만 인형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서비스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인형이 나를 닮으면, 자아를 투영한다
2022년 4월에 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재개했는데, 추억 소환 열풍이 불며 앱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어요. 싸이월드의 인기 서비스 중 하나는 나를 대변하는 캐릭터 ‘미니미’였어요. 사람들은 ‘도토리’라는 가상화폐로 아이템을 사서 정성스럽게 미니미를 꾸몄죠. 누구라 할 것 없이 미니미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이처럼 싸이월드가 200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에요. 어른들도 이런데, 이제 막 자아상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어린이라면 더 그럴 수밖에요. 그래서 아이들은 가장 친숙한 장난감, 그것도 사람과 닮은 인형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아이들과 닮은 인형이 있던가요? 사람의 모습을 한 인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늘씬한 몸매를 한 바비 인형입니다. 비현실적이죠. 또한 동생처럼 돌봐줄 수 있거나 역할극을 할 수 있는 아기 인형들도 흔해요. 하지만 정형화되어 있어요. 백인이 아닌 아이, 짧은 헤어 스타일을 추구하는 아이, 신체적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 등은 자신이 모습과 닮은 인형을 찾기 어렵죠. 이런 아이들은 인형 놀이에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보통의 여자 아이라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인형과 다른 자신은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죠.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어려울 거예요.
아메리칸 걸은 아이들의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인형을 통해 여자 아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죠. 그래서 아메리칸 걸에서는 모든 소녀가 자신과 닮은 인형을 찾을 수 있어요. 아메리칸 걸의 ‘트룰리 미(Truly Me, 진정한 나)’ 시리즈는 10가지의 머리 색, 5가지의 눈 색, 5가지의 피부색 등을 가진 다양한 인형들을 소개하죠. 아이들은 헤어 스타일, 얼굴형, 피부색, 주근깨, 건강 상태 등을 고르면서 스스로와 비슷한 모습을 한 인형을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시티호퍼스
예를 들어 볼게요. 자가면역질환으로 머리카락이 없는 8살 소녀 미아는 자신과 꼭 닮은 아메리칸 걸 인형 ‘알로페시아‘를 갖고 있어요.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머리카락이 없는 알로페시아를 주문해준 뒤로 둘은 단짝이 되었죠. 알로페시아 인형뿐만 아니에요. 호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던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의 병원에는 보청기를 낀 인형, 휠체어를 탄 인형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이처럼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에서는 신체적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들도 자신과 닮은 인형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더 인상적인 점이 있어요. 이 인형들을 치료와 교정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휠체어를 탄 인형이 다른 인형들과 함께 즐겁게 농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등 주체성 있게 바라보죠.
이쯤되니 이미 갖고 있던 인형과 함께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를 찾는 어린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요. 그들에게 아메리칸 걸은 단순히 인형이 아니라 미니미예요. 자아가 투영된 분신같은 존재인 셈이죠.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인형의 헤어 스타일, 패션 등을 자기자신과 동일하게 만드는 데 공을 들여요. 심지어 스스로가 아프거나 인형에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들러 치료까지 하는 거고요. 이렇듯 누구나 인형에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에서 인형을 단장하고 아껴주면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표현하는 법을 알아갑니다.
인형에 스토리가 있으면, 친구가 되고 싶다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를 차별화시키는 포인트는 또 있어요. 인형 가게인데 곳곳에 책을 진열해 놓았죠. 생뚱맞아 보일 수 있지만 책은 아메리칸 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요. 인형을 인형이 아니라 캐릭터로 만들어 주거든요. 아메리칸 걸에서 판매하는 인형 중, 커스텀 인형인 ‘트룰리 미’를 제외한 모든 인형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단순히 인형에다가 이름, 나이, 인종, 취미 등 페르소나만 부여한 게 아니에요. 책에서 각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와 세계관이 펼쳐지죠. 각 인형은 이 스토리와 세계관 속에서 고유한 인형으로 거듭나고 성장하는 거예요.
ⓒ시티호퍼스
세계관을 만들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복제 불가능한 인형으로 만든 것도 영리한데 아메리칸 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어요. ‘올해의 소녀’라는 시그니처 컬렉션을 만들었거든요. 올해의 소녀는 현실에 있을 법한, 그리고 사회적 변화상을 담아낸 캐릭터를 만들어서 매년 1월 1일에 공개하고 1~2년 동안만 판매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이에요. 올해의 소녀 이야기는 소설책, 유튜브 동영상 등의 매체를 통해 아이들에게 공유돼요.
2017년에 선정된 올해의 소녀, 한국계 미국인 ‘수지(Suzie)’를 만나볼까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수지는 비디오 제작에 푹 빠져 있어요. 수지는 친구들과 ‘지 크루(Z Crew)’라는 팀을 꾸려 유튜브에 스탑모션 비디오와 브이로그 등을 찍어 올리는데요. 두 권의 책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걸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수지를 찾아볼 수 있어요. 단순히 수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준 게 아니라, 수지가 촬영하고 편집한 작품들을 올려 놓았죠. 또 영상 속 수지는 구독자들에게 스토리텔링 방법이나 특수효과 사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지 크루의 멤버를 새로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해요. 마치 어딘가에 수지라는 아이가 정말 존재할 것만 같죠!
ⓒAmerican Girl
인형이 아니라 스토리를 전하는 아메리칸 걸의 전략은 매장 디스플레이에서도 드러나요.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는 큰 공간을 할애해 ‘캐릭터’ 중심의 구성을 꾸며 놓았어요. 가장 눈에 띄는 자리는 단연 이번 해의 ‘올해의 소녀’가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주력하는 캐릭터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지키고 있어요. 인형의 이름이 쓰인 커다란 표지판과 서로 다른 테마색이 새로운 캐릭터라는 걸 알려줘요.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이나 갖고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그 소녀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고, 책도 함께 진열되어 있어요. 각 소녀의 세계관을 공간에 풀러낸 거예요. 예를 들어 농구팀 주장으로 활약하는 소녀의 경우 실내 게임용 농구대를 설치해 놓고,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소녀의 경우 게임을 해볼 수 있는 커다란 게임기가 진열되어 있는 식이죠.
ⓒ시티호퍼스
물론 인형을 데리고 다니며 예쁘게 꾸미는 것도 즐거운 일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아메리칸 걸 플레이스에서 아이들은 인형에 대한 책이나 영상을 보고, 이야기 속과 비슷하게 꾸며진 매장을 둘러보며 그 캐릭터의 세계 자체를 받아들입니다. 스토리에 몰입할수록 인형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지고, 상상해본 적 없던 캐릭터와 세계를 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관점도 확장되죠. 아메리칸 걸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세계 속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성장을 추구하는 소녀들이 있어요. 하나하나가 그 누구와도 다른 존재들이죠. 하지만 결코 틀린 아이는 없습니다.
인형에 배움을 더하면, 어른도 좋아한다
아메리칸 걸의 창립자 플레샌트 롤랜드와 사만다, 커스틴, 몰리 인형이에요. ⓒAmerican Girl
앞서 설명했듯이 아메리칸 걸은 인형을 바라보는 관점이 남달라요. 그렇다면 이런 인형은 누가, 왜 만든 걸까요? 1986년, 아메리칸 걸의 창업자 플레샌트 롤랜드(Pleasant Rowland)는 조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당시 헝겊으로 만든 양배추 인형이 인기였지만 조잡한 외양이 마음에 걸렸죠. 바비 인형은 더 아니었어요. 80년대의 여성들은 기존의 사회적 관습에 맞서 스스로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있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십대 퀸카 같은 인형을 갖고 논다는 게 안타까웠죠. 그녀는 여자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 양배추 인형 아니면 바비 인형밖에 없다는 사실이 싫었어요. 그녀는 여자 아이들이 그 시절을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기를, 그러면서도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그런 바람을 가진 미국인 여성이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죠.
전직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했던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어요. 플레샌트가 원하는 인형은 어린 아이들의 나이에 어울리고,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어야 했죠. 그녀는 곧바로 서로 다른 역사적 시대를 살아가는 9살짜리 소녀들의 소설책을 생각해 냈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막 튀어나온 인형들도요. 그렇게 아메리칸 걸의 원조 인형들이 탄생했습니다. 식량난으로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개척 시대의 ‘커스틴(Kirsten)’. 할머니와 살면서 하인 소녀와 우정을 쌓아가는, 에드워드 시대의 ‘사만다(Samantha)’. 전쟁을 피해 영국에서 피난 온 친구를 사귀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아가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몰리(Molly)’. 이 세 인형이 아메리칸 걸의 출발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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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걸의 시그니처 컬렉션 중 하나가 바로 이 원조 컨셉을 이어받은 ‘역사 속 캐릭터‘ 시리즈예요. 1764년의 미국 원주민 소녀 ‘카야(Kaya)’부터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는 1986년의 ‘코트니(Courtney)’까지. 열 한 명의 캐릭터가 존재하는데요. 다양한 배경의 소녀들이 추가되면서 아이들은 더 풍부하고 폭넓은 역사를 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교훈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는 단연 1864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애디(Addy)’의 이야기입니다.
1864년은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어요. 아직 노예제가 존재하던 그때, 애디와 그녀의 가족은 남부의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고 있었죠. 농장에서의 생활은 참혹했습니다. 어린 애디는 매일 밭에서 일을 해야 했고, 주인에게 수시로 얻어맞곤 했죠. 결국 애디는 어머니와 함께 자유를 찾아 농장을 탈출해요. 북부로 도망친 후에도 다른 가족들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애디를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애디는 강하고, 용감하고, 회복력이 있는 소녀였죠. 처음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애디는 친구도 사귀고 교사의 꿈도 꾸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할 차별의 역사를 배웁니다. 또 절망을 이겨내고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은 애디의 모습은 현실에서 비슷한 슬픔을 겪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용기가 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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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아메리칸 걸은 아이들이 성장할 때 겪는 고민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줘요. 인형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자기계발서도 아메리칸 걸의 인기 제품 중 하나인데요. 짝사랑에 빠졌을 때, 스스로가 별 볼일 없이 느껴질 때처럼 혼자서 끙끙댈 만한 문제를 다루죠.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자라면서 누구나 겪는 별 것 아닌 일로 느껴질 지 몰라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고민이 세상 전부인 마냥 중요하니까요. 아이들의 문제를 ‘어차피 다 지나갈 일‘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로 여기면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주인공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사회상이 발전하면, 인형도 성장한다
‘아메리칸 걸’ 말고, 미국 하면 생각나는 인형 브랜드가 있나요? 사실 아메리칸 걸보다 ‘바비(Barbie)’가 더 유명하죠. 그래서 이번엔 바비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창업자 플레샌트의 생각처럼 아메리칸 걸은 교육적이지 못한 바비 인형의 대안으로 만든 인형이에요. 하지만 아시나요? 그 바비 인형도 만들어질 당시인 1950년대에는 혁신적인 발명이었다는 걸요.
‘바비’라는 이름은 ‘바바라(Barbara)‘라는 여자아이 이름에서 따왔어요. 바로 ‘마텔(Mattel)’의 창업자 핸들러(Handler) 부부의 딸이었죠. 핸들러 부부는 아들인 켄(Ken)이 가지고 놀 장난감은 많은데 딸 바바라가 가지고 놀 장난감이 거의 없다는 데 문제 의식을 느꼈어요. 당시 여자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라고 해봤자 아기 인형이 전부였거든요.
이들은 여자 아이들에게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형을 만들어 꿈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비 인형을 만들었죠. 바비는 당대 미국의 전형적인 여성상인 현모양처의 역할을 깨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이들은 바비를 갖고 놀며 젊은 여성이 패션 디자이너도, 파일럿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바비처럼 멋지고 유능한 어른이 된 자신을 그려볼 수 있었죠.
바비를 만든 취지는 좋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어요. 멋진 직업인으로서의 롤모델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바비였지만, 비현실적으로 날씬하고 아름다운 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인형은 어느새 소녀들에게 외모에 대한 편견과 강박을 심어주고 있었어요. 바비는 차차 ‘아름답지만 지성적이지 못한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갔죠. 급기야 ‘수학은 싫어하고, 쇼핑은 좋아하는’ 예쁘기만 한 여자라는 오명까지 안게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 드리려고 해요. 바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메리칸 걸은 놀랍게도 창립 30년만인 1998년, 바비를 만든 장난감 회사 마텔에 인수되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황당한 일만은 아닙니다. 비록 여성의 아름다움을 획일적인 틀에 가둔다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바비도 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거든요.
아메리칸 걸이 탄생한 바로 이듬해인 1969년에는 최초의 흑인 바비 인형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휠체어를 탄 바비가 등장했어요. 그리고 2016년, 마텔은 날씬하기만 했던 바비 인형에 키 작은 체형, 키 큰 체형, 굴곡 있는 체형을 추가했습니다. #TheDollEvolves라는 캠페인의 일환이었어요. 마텔에 이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아메리칸 걸은 인수된 후에도 자기 색을 지킬 수 있었던 거고요.
마텔이 추진한 인형은 진화한다는 이 캠페인처럼,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 달라짐에 따라 인형의 모습도 계속해서 변화해 나갈 거예요. 다음 세대의 인형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주게 될까요?
Reference
• Why bald dolls displayed at American Girl made this mom cry